2009년 11월 21일
아침 여덟시 오십분. 국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 나 있는 골목. 한쪽은 아파트들이 빼곡하고 다른쪽은 주로 공장들이 많은 곳. 학교나 관공서도 아홉 시 등교나 출근이 정상이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이전을 출근으로 명시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정에서 아직도 아홉시를 정출근으로 하는 곳이 있다면 분명히 아슬아슬한 출근시각을 목전에 둔 때이다. 거의 목숨을 건 것처럼 일체의 양보도 없이 신호등만 노려보다 노란 불이 껌뻑껌뻑 바뀌기 시작하기 무섭게 뒤에서 빵 경적을 울려댄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신호등이 바뀌려 껌뻑거리자 기다리던 줄에서 앞으로 튀어나오려고 주춤거리는데도 빠져나오던 아파트쪽 줄은 멈추지를 않았다. 한 대만 더 한 대만 더, 이러면서 계속 꼬리를 물었다. 이윽고 국도에서 기다리던 차들 인내심이 바닥나 빠앙 빵 양쪽에서 번갈아 경적을 울려댔다. 드디어 아파트쪽 줄은 아쉽게 멈춰섰는데 그 사이에 짧은 신호등이 벌써 넘어가는 바람에 국도에서 양쪽 골목으로 들어가려던 차들이 기회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멈춰선 채로 다음 신호를 기다릴 만치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신호등이 바뀌었건 말았건 놓친 기회 끄트머리에 매달려 좌회전 좌회전 줄줄이 꼬부라졌다. 자, 이제 국도에서 직진을 해야 하는 차들이 난리가 났다. 출발하려고 움찔거리는데도 좌회전 차량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못 참은 어느 직진 차량이 그냥 튀어나왔다. 정말 별 것 아닌 사거리, 거기가 그만 뒤엉켜 버린 것이다.
애초에 신호를 무시하고 제 갈 길만 고집하여 거기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차들은 진작에 사라져 버려 꽁무니도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던 차들끼리 서로 제가 갈 차례라고 머리를 디밀며 빵 빵 빵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어느 쪽도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니 그 사이에 신호등은 계속 바뀌건만 한두 대만 간신히 빠져나갈 뿐 모두 인상만 쓰고 경적만 울려대고 있었다. 나 역시 남자를 제시간에 출근시키려면 급한 것임에 분명하지만 그런다고 앞으로 나갈 수 없음이 뻔한데 괜히 용을 쓸 필요는 없겠다 싶어 느긋하게 되어가는 꼴을 보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면 그래도 어떻게든 풀리지 않겠는가. 그 때였다. 아마도 앉은 채로 뛰고 싶은 심정으로 발 동동 구르며 온갖 욕설을 퍼부었음직한 운전자가 도저히 못 참겠는지 휙 핸들을 꺾어 중앙선을 넘어섰다. 뒤엉켜 있는 거기만 빠져나가면 어떻게든 다시 제길로 들어서 달려갈 수 있을 거라 계산했겠지. 그러나 마주오는 차선도 다급하기는 마찬가지, 두어 대 간신히 빠져나가 빈 자리를 잽싸게 메꾸며 달려든 차들과 중앙선을 넘은 차가 마주보고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차창이 열리고 얼굴 삐죽 내밀고 고함을 치고 욕을 하고. 본인들이야 심각했겠지만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혀를 차며 빙글빙글 비웃어지는 광경이었다.
정말 별 거 아닌 사거리에서 그렇게 10분 이상을 지체하고 겨우 건너서 달리면서 쓴 웃음이 나왔다. 내가 조금만 일찍 일어나 길을 나섰더라면 출근에 대 발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될 것은 생각지 않고 남들만 탓하며 혼자 앞서 빠져나가고자 하면 상쾌한 출근길은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그 꼴로 살면서도 절대 포기할 줄 모르는 이기. 사는 게 모두 그렇다. 내게 다소 불리해 보이더라도 일단 정해진 대로 살면 두루 다 편할 것이다. 어느 개인만을 위하지 않고 모두를 위한 최소공배수로 마련한 게 법이요 규칙일 테니까. 그런데 자기한테만 불리하다는 불만을 품으며 꼭 어기고 편법을 쓰려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들로 인해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 정작 다들 손해 보고 피해 보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최초에 일을 벌여놓고 꽁무니를 뺀 차들이 비록 그 덕을 보아 지각을 면했다고는 하지만 출근이 하루만 있는 게 아니다 보면 그들도 언젠가는 똑같이 당할 날 있으리라. 아니, 편법으로 이익을 보는 것이 어쩌다 한두 번일 뿐 사실은 대부분은 피해를 입게 마련인 게 인생이다. 달리는 차량 수에 따른 신호배분을 달리하자고 이의를 제기하고 그렇게 되도록 애를 써야지, 지금 당장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어기는 것이 과연 현명하겠는가.
그렇게 거창하게 사회적 공공을 위한 부분에만 해당하는 것 아니다. 가까운 친지 사이에서도 심지어는 가족들 사이에서도 그런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 남들은 이런 것도 저런 것도 사고 여기도 저기도 가는데 우리만 못 그러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각자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을 수긍하지 않아 수준 이상의 과소비 따위로 가정 전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숱하게 보아왔다. 무엇이든 엄마가 있어야 하는 아이들과 자기들끼리도 잘 해나가는 아이들 차이도 인정하지 않고 남들 놀러다니니까 자기도 쫓아다니다가 관리 안 된 아이들이 겉도는 바람에 풍비박산이 되어 버리는 가정도 보았다. 설령 언뜻 보기에는 차별이 있는 것 같아도 사실은 누구에게나 균등한 기회가 가기 마련이다. 그것을 내 눈으로 보지 않고 남의 눈으로 보았을 때 억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이고, 내 심정만 앞세우다 보면 평화에 균열이 생긴다. 남의 기회를 곁눈질하지 말고 제게 온 기회에만 정당하게 올라탈 것-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잘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깨달으면 좀 좋을까만. 단 5분의 게으름을 위해 10분 지각한 남자는 텅 빈 길을 혼자 걸어올라갔다. 공통의 출근시각인 아홉시를 넘겨 버린 돌아오는 길, 그 사거리는 다시 한적해져 있었다.
# by 暗雲姬 | 2009/11/21 11:15 | 삶.. | 트랙백 | 덧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