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02일
그 국어선생님
아침에 딸애와 무슨 이야기 끝에 "우좌지간" 했는데 아이는 눈치를 채지 못 하고 지나가고 나 혼자서만 훅 숨을 들이마셨다. 내 입은 왜 그 말을 뱉아냈을까. 벌써 서른 다섯 해 전에나 썼던 말인데.
고등학교 때 우리 국어를 맡았던 박선생님. 축구하다가 엄지 발가락을 다쳐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그이는 참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까르르르 곧잘 터지는 웃음을 주체 못 하던 여고생들 앞에 서기에는 지독하게 평범하게 못 난 얼굴이었다. 못 생긴 것도 특별하게 못 생긴 이는 나름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박선생님은 너무 평범하게 못 생겨서 아무의 주의도 끌지 못 할 지경이었다.
2학년 올라가 새로 반 배정을 받고 과목담당 선생님에 대해 이리저리 정보를 캐던 첫날, 국어 담당 박선생님에 대한 정보라고는 못 생긴데다 다리까지 저는 서른 중반의 유부남이라는 것 뿐이었다. 아 또 한 가지, 부인은 연극배우로 영국에 유학 중이라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일 년에 서너 차례 고작 서는 월요일 조회 때 먼 발치에서 봤던 그 남자보다는, 연극배우라는 아내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유학 중이라니...그 흔한 미국도 아니고 영국에 있다니 더 멋있다 싶었다. 영화배우나 탈렌트에 대해서는 잘 알았어도 연극배우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우리는, 그래서 그 직업이 더 멋져 보였고, 게다가 남편을 혼자 두고 영국유학을 떠난 여자라...괜스레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국문과 동기라는 뉴스도 날아들었다. 와, 연극배우가 될 여자가 어떻게 저런 남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니, 점심시간에 왁자하게 떠들었다. 전 해에 3학년 담당이었던 박선생님에 대해서는, 성격이나 수업방식 따위 얘기를 전해듣기 어려웠다. 그 때는 선배 대하는 게 왜 그리 어려웠는지 함부로 말을 섞지도 못 했고, 더군다나 3학년은 제일 꼭대기 층에 배정되어 계단까지 달리 썼던 터라 1학년 우리와 얼굴 마주칠 일도 없었다. 3학년도 3학년만 담당하던 선생님도 우리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던 거다.
박선생님이 우리 정규국어를 담당한 건 아니었다. 국어 보충수업 담당이었다. 그것도 하필 끝 두 반만 그이 보충수업으로, 앞의 여섯 반은 우리도 아는 다른 선생님이었다. 그이는 여전히 3학년 정규수업을 맡는다고 했다. 청소를 마치고 보충수업을 기다리면서, 학년 올라오고 첫날이라 다른 반으로부터 경험을 들을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궁금한 것도 없이 시끌거리고 있었다. 내심 부인에 대해서 좀 물어보리라 작정을 한 아이들이 있었을 뿐이다. 준비하라는 책도 없었고 미리 받은 인쇄물 따위도 없었으므로 죄다 빈 책상이었다. 나는 늘 첫수업마다 그랬듯이 칸이 쳐있지 않은 빈 연습장을 꺼내놓고 새 선생님 그릴 준비를 마쳤다. 갑자기 아이들이 조용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재잘대던 한 아이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더니 그 남자가 교단 위에 서서 슬픈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했다. 옆동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찌르고...그렇게 하여 파도타듯 고요와 집중이 퍼져갔던 것이다.
이윽고 더 이상 아뭇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갑자기 몸을 휙 돌린 그이는 절뚝거리며 칠판 제일 오른쪽으로 갔다. 쿵딱쿵딱 리드미컬한 걸음소리가 판자로 된 교단을 울렸다. 칠판 위 제일 구석에서부터 백묵으로 내려쓰기 시작한...그게 글씨냐, 그림이냐...것이 왼쪽 아래 구석까지 이어지는 동안 소근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몇몇은 습관처럼 베끼기 시작했으나 이내 포기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선생님 손을 따라서 아는 글자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입속말로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땅. 마지막 한 글자를 끝내자 백묵으로 칠판에 점을 찍고는 휙 던져 버리며 돌아선 선생님은 줄줄 읽으며 해석을 시작했다. 옛중국 누구의 시였는데, 읽고 해석하고...그 해석이라는 게 또 여간 감상적이 아니어서 우리들은 순식간에 넋이 빠져 귀를 기울였다. 벌레 기어가는 것 같은 한자를 그 커다란 칠판에 빼곡하게 적은 것과 같은 속도로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읊어대다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그대로 휙 돌아나가 버리는 선생님. 아무도 입을 벌리지 않다가...한 아이가 쪼로록 뛰어나가더니 선생님 가 버렸다며 들어왔다.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아주 간 거야? 왜 벌써 갔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귀신에 홀렸나 봐.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칠판을 찬찬히 보던 아이 몇이, 끝까지 다했으니까 간 게로구나, 결론을 지었다. 내 연습장은 하얗게 비어 있는 채로였다. 그 후로 우리는 아무도 그 사람이 못 생겼다는 둥 하는 얘길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이에게 얼굴이라는 게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 했다. 오로지 아주 슬픈 눈 뿐이었다.
수업 시작된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박선생님을 찾아 주번이며 반장이며 교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없다니까 다른 선생님들이 그냥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한 시간은 그냥 지나 버렸다. 당시에 보충수업이 겨우 한 시간이거나 두 시간이었고, 그것 끝나면 자율학습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지만 교실에 남는 애들이 반 넘었다. 단칸방에 사는 집이 수두룩했던 시절, 집에 가봤자 공부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자율학습인 셈이었다. 10시만 되면 숙직선생님이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내쫓아서 할 수 없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하긴 그렇게 나오지 않으면 막차 끊기고 통행금지 걸리고 해서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철봉 근처 벤치에서 박선생님이 하늘을 보고 앉아 있는 걸 보았노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또다른 아이들은, 보충수업 끝나자마자 갈 때도 아직 어둡기 전이었는데 그 자리에 박선생님이 있었다 했다. 저기 있는 걸 모르고 반장이 그리 찾아 헤맸구나,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갔다고 했다. 하늘에서 무엇을 보느라고 수업 들어오는 것도 잊고 오밤중까지 거기 있었을까. 그 밤 안에 집으로 돌아가기나 한 걸까.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래라..." 그러면서 공중의 나비를 좇는 양 걷다가 쿵 교단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러도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이어지는 낭송...우리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승무라도 추는 양 팔을 휘젓고 한 바퀴 돌고...우리 눈은 그이를 따라가기 바빴다. 마냥 걷다가 유리창에 이마를 박고는 그냥 핑 돌아서 다시 계속되는 낭송과 해설. 한참 해설을 하며 문쪽으로 걷다가 그냥 내처 나가 버려서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나가면 선생님은 중얼중얼 계속 강의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곤 했다. 우리들도 선생님 뒤를 따라 교무실까지 갔다가 머쓱해져 돌아왔었다. 어떤 시를 막 읊고 계시는 중에 앞자리 학생이 곱게 접은 손수건을 내밀며 "선생님, 울지 마세요" 하고 쿨쩍 따라 울었다. 지정한 학생이 떨리는 소리로 시를 읽는 걸 듣고도 혼자 소매로 눈을 훔치고, 아이가 나름으로 해설을 하는 것을 주의깊게 듣다가 툭 끼어들어 기묘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강의하며 사라져 버린 문을 마냥 바라보다가 주번이 주섬주섬 출석부며 빼놓은 손목시계며 분필통이며 선생님 물건을 챙겨 교무실로 가져다 드리기 일쑤였다. 때로는 다음 수업이 시작되어도 아직 강의가 끝나지 않아 다른 선생님이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고, 열린 문을 톡톡 두들기며 일깨우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 시간이 끝났음을, 다음 선생님이 기다림을 알려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 보충수업은 1년 내내 시 수업이었다. 시가 그렇게 흥미로운 것임을 처음 안 아이들이 많았다. 너도 나도 시집을 들고 다녔고, 자작시를 적은 작은 공책을 소중하게 끼어안고 다녔다. 새벽 일찍 꽃다발 안고 와 교무실의 박선생님 책상에 올려놓는 학생들도 생겼고, 1주일에 한 번씩 박선생님 방석을 갖고 가 빨아오는 학생도 생겼다.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보면 선생님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책을 읽고 있을 뿐 다른 선생님들과 섞여 커피라도 마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가끔 교감선생님 책상 앞에 서서 야단맞고 있는 것은 보았다. 우리의 1년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고, 3학년이 되었을 때 그이가 1학년 담당이 되었다는 소리에 은근히 1학년을 질투하기도 했다. 그리고...마침내 돌아온 부인과 이혼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 부인이 감당할 수 없었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들 수근거렸다. 졸업식날 아무도 박선생님을 만나지 못 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벼르던 아이들은 허탈해 했다. 여러 달 지나서 들은 이야기인데, 학교 뒷산 언저리에서 그 추운 날 펑펑 울고 계시는 모습을 먼 발치서 본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학교를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박선생님은 늘 右左之間, 此於彼라고 말을 했다. 그 한자말, 순서 바꾸어 써도 틀리는 건 아니지만 오래 써온 것과 한 글자 바꿨을 뿐인데도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다. 왜 그렇게 쓰시냐고 감히 물을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자작시를 들고 찾아가거나 시 아니더라도 어떤 국어문제, 문학에 대해 물어보면 상당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그런 소소한 것을 시비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우좌지간 눈물 핑 도는 수업시간에도, 청소시간에 복도에서 만났을 때도, 심지어는 교감선생님과 얘기하는 것을 지나다 언뜻 들었을 때도...정색을 하고 "우좌지간", "어피차"라고 말했다. 어느 새 우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해 버리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래서 박선생님에 대해서는 거의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고, 말버릇도 다시 예전대로 돌아왔는데...오늘 아침에 왜 갑자기 "우좌지간"이라고 말했을까. 그 때 그 교실에 앉아 있던 우리 동무들도 나처럼 문득 "우좌지간"이라고 말을 할까.
그 때도 대학입시는 치열했다. 지금이야 아무나 다 가야 하는 교육과정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멋진 엘리트, 거기에 올라가고자 아름답게 꿈꾸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끝내는 그 꿈을 접어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미 입시를 치러 고등학생이 된 우리들이었던지라 특별히 실력이 쳐져서 대학을 포기하기보다는 경제사정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쨌든 참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만약 지금이라면, 수업을, 그것도 보충수업을 그 따위(?)로 하는 선생이 있다면 당장 퇴출감일 것이다. 학교 관리자나 다른 선생님, 그리고 학생 본인, 전해들은 학부모들도 몰려와 쫓아내라고 시위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그 때는 그런 괴짜 선생님들이 제법 흔했다. 지금처럼 안정된 직장을 위해 교사가 되려는 것보다, 다른 것을 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교직에 몸 담은 이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박봉이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지 못 했던...가난한 이들의 꿈. 학교를 떠난 박선생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우리보다 스무 살쯤 많은 서른 중반의 그 분은 지금도 어디선가 이 하늘 아래 살아계실까. 창 밖으로 펼쳐진 맑은 하늘, 우리들의 푸른 꿈, 언제나 슬펐던 박선생님 슬픈 눈과 절룩거리는 외로운 뒷모습...아침부터 목이 멘다.
고등학교 때 우리 국어를 맡았던 박선생님. 축구하다가 엄지 발가락을 다쳐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그이는 참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까르르르 곧잘 터지는 웃음을 주체 못 하던 여고생들 앞에 서기에는 지독하게 평범하게 못 난 얼굴이었다. 못 생긴 것도 특별하게 못 생긴 이는 나름 관심을 받을 수 있었지만 박선생님은 너무 평범하게 못 생겨서 아무의 주의도 끌지 못 할 지경이었다.
2학년 올라가 새로 반 배정을 받고 과목담당 선생님에 대해 이리저리 정보를 캐던 첫날, 국어 담당 박선생님에 대한 정보라고는 못 생긴데다 다리까지 저는 서른 중반의 유부남이라는 것 뿐이었다. 아 또 한 가지, 부인은 연극배우로 영국에 유학 중이라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일 년에 서너 차례 고작 서는 월요일 조회 때 먼 발치에서 봤던 그 남자보다는, 연극배우라는 아내에게 더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유학 중이라니...그 흔한 미국도 아니고 영국에 있다니 더 멋있다 싶었다. 영화배우나 탈렌트에 대해서는 잘 알았어도 연극배우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던 우리는, 그래서 그 직업이 더 멋져 보였고, 게다가 남편을 혼자 두고 영국유학을 떠난 여자라...괜스레 주눅이 들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국문과 동기라는 뉴스도 날아들었다. 와, 연극배우가 될 여자가 어떻게 저런 남자와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니, 점심시간에 왁자하게 떠들었다. 전 해에 3학년 담당이었던 박선생님에 대해서는, 성격이나 수업방식 따위 얘기를 전해듣기 어려웠다. 그 때는 선배 대하는 게 왜 그리 어려웠는지 함부로 말을 섞지도 못 했고, 더군다나 3학년은 제일 꼭대기 층에 배정되어 계단까지 달리 썼던 터라 1학년 우리와 얼굴 마주칠 일도 없었다. 3학년도 3학년만 담당하던 선생님도 우리와는 다른 세계 사람이었던 거다.
박선생님이 우리 정규국어를 담당한 건 아니었다. 국어 보충수업 담당이었다. 그것도 하필 끝 두 반만 그이 보충수업으로, 앞의 여섯 반은 우리도 아는 다른 선생님이었다. 그이는 여전히 3학년 정규수업을 맡는다고 했다. 청소를 마치고 보충수업을 기다리면서, 학년 올라오고 첫날이라 다른 반으로부터 경험을 들을 수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궁금한 것도 없이 시끌거리고 있었다. 내심 부인에 대해서 좀 물어보리라 작정을 한 아이들이 있었을 뿐이다. 준비하라는 책도 없었고 미리 받은 인쇄물 따위도 없었으므로 죄다 빈 책상이었다. 나는 늘 첫수업마다 그랬듯이 칸이 쳐있지 않은 빈 연습장을 꺼내놓고 새 선생님 그릴 준비를 마쳤다. 갑자기 아이들이 조용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언제부터 거기 서 계셨는지 아무도 몰랐다. 재잘대던 한 아이가 우연히 고개를 들었더니 그 남자가 교단 위에 서서 슬픈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했다. 옆동무 옆구리를 쿡 찌르고 찌르고...그렇게 하여 파도타듯 고요와 집중이 퍼져갔던 것이다.
이윽고 더 이상 아뭇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갑자기 몸을 휙 돌린 그이는 절뚝거리며 칠판 제일 오른쪽으로 갔다. 쿵딱쿵딱 리드미컬한 걸음소리가 판자로 된 교단을 울렸다. 칠판 위 제일 구석에서부터 백묵으로 내려쓰기 시작한...그게 글씨냐, 그림이냐...것이 왼쪽 아래 구석까지 이어지는 동안 소근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몇몇은 습관처럼 베끼기 시작했으나 이내 포기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선생님 손을 따라서 아는 글자 하나라도 찾아내려고 눈을 부릅뜨고 입속말로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땅. 마지막 한 글자를 끝내자 백묵으로 칠판에 점을 찍고는 휙 던져 버리며 돌아선 선생님은 줄줄 읽으며 해석을 시작했다. 옛중국 누구의 시였는데, 읽고 해석하고...그 해석이라는 게 또 여간 감상적이 아니어서 우리들은 순식간에 넋이 빠져 귀를 기울였다. 벌레 기어가는 것 같은 한자를 그 커다란 칠판에 빼곡하게 적은 것과 같은 속도로 거의 숨도 쉬지 않고 읊어대다가 갑자기 뚝 그치더니 그대로 휙 돌아나가 버리는 선생님. 아무도 입을 벌리지 않다가...한 아이가 쪼로록 뛰어나가더니 선생님 가 버렸다며 들어왔다.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아주 간 거야? 왜 벌써 갔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귀신에 홀렸나 봐. 웅성거리는 와중에도 칠판을 찬찬히 보던 아이 몇이, 끝까지 다했으니까 간 게로구나, 결론을 지었다. 내 연습장은 하얗게 비어 있는 채로였다. 그 후로 우리는 아무도 그 사람이 못 생겼다는 둥 하는 얘길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이에게 얼굴이라는 게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 했다. 오로지 아주 슬픈 눈 뿐이었다.
수업 시작된지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는 박선생님을 찾아 주번이며 반장이며 교무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어도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이 없다니까 다른 선생님들이 그냥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한 시간은 그냥 지나 버렸다. 당시에 보충수업이 겨우 한 시간이거나 두 시간이었고, 그것 끝나면 자율학습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지만 교실에 남는 애들이 반 넘었다. 단칸방에 사는 집이 수두룩했던 시절, 집에 가봤자 공부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완벽한 자율학습인 셈이었다. 10시만 되면 숙직선생님이 교실마다 돌아다니며 내쫓아서 할 수 없이 나오는 형편이었다. 하긴 그렇게 나오지 않으면 막차 끊기고 통행금지 걸리고 해서 돌아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전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철봉 근처 벤치에서 박선생님이 하늘을 보고 앉아 있는 걸 보았노라는 아이들이 있었다. 또다른 아이들은, 보충수업 끝나자마자 갈 때도 아직 어둡기 전이었는데 그 자리에 박선생님이 있었다 했다. 저기 있는 걸 모르고 반장이 그리 찾아 헤맸구나, 저희끼리 이야기하며 갔다고 했다. 하늘에서 무엇을 보느라고 수업 들어오는 것도 잊고 오밤중까지 거기 있었을까. 그 밤 안에 집으로 돌아가기나 한 걸까.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래라..." 그러면서 공중의 나비를 좇는 양 걷다가 쿵 교단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러도 이내 벌떡 일어나 다시 이어지는 낭송...우리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승무라도 추는 양 팔을 휘젓고 한 바퀴 돌고...우리 눈은 그이를 따라가기 바빴다. 마냥 걷다가 유리창에 이마를 박고는 그냥 핑 돌아서 다시 계속되는 낭송과 해설. 한참 해설을 하며 문쪽으로 걷다가 그냥 내처 나가 버려서 아이들이 우루루 따라나가면 선생님은 중얼중얼 계속 강의를 하면서 계단을 내려가곤 했다. 우리들도 선생님 뒤를 따라 교무실까지 갔다가 머쓱해져 돌아왔었다. 어떤 시를 막 읊고 계시는 중에 앞자리 학생이 곱게 접은 손수건을 내밀며 "선생님, 울지 마세요" 하고 쿨쩍 따라 울었다. 지정한 학생이 떨리는 소리로 시를 읽는 걸 듣고도 혼자 소매로 눈을 훔치고, 아이가 나름으로 해설을 하는 것을 주의깊게 듣다가 툭 끼어들어 기묘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강의하며 사라져 버린 문을 마냥 바라보다가 주번이 주섬주섬 출석부며 빼놓은 손목시계며 분필통이며 선생님 물건을 챙겨 교무실로 가져다 드리기 일쑤였다. 때로는 다음 수업이 시작되어도 아직 강의가 끝나지 않아 다른 선생님이 문 앞에서 기다려야 했고, 열린 문을 톡톡 두들기며 일깨우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 시간이 끝났음을, 다음 선생님이 기다림을 알려드리려 하지 않았다.
그 보충수업은 1년 내내 시 수업이었다. 시가 그렇게 흥미로운 것임을 처음 안 아이들이 많았다. 너도 나도 시집을 들고 다녔고, 자작시를 적은 작은 공책을 소중하게 끼어안고 다녔다. 새벽 일찍 꽃다발 안고 와 교무실의 박선생님 책상에 올려놓는 학생들도 생겼고, 1주일에 한 번씩 박선생님 방석을 갖고 가 빨아오는 학생도 생겼다. 일이 있어 교무실에 가보면 선생님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거나 책을 읽고 있을 뿐 다른 선생님들과 섞여 커피라도 마시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가끔 교감선생님 책상 앞에 서서 야단맞고 있는 것은 보았다. 우리의 1년은 그렇게 지나가 버렸고, 3학년이 되었을 때 그이가 1학년 담당이 되었다는 소리에 은근히 1학년을 질투하기도 했다. 그리고...마침내 돌아온 부인과 이혼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마 부인이 감당할 수 없었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들 수근거렸다. 졸업식날 아무도 박선생님을 만나지 못 했다. 같이 사진이라도 찍으려고 벼르던 아이들은 허탈해 했다. 여러 달 지나서 들은 이야기인데, 학교 뒷산 언저리에서 그 추운 날 펑펑 울고 계시는 모습을 먼 발치서 본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학교를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박선생님은 늘 右左之間, 此於彼라고 말을 했다. 그 한자말, 순서 바꾸어 써도 틀리는 건 아니지만 오래 써온 것과 한 글자 바꿨을 뿐인데도 굉장히 신선하게 들렸다. 왜 그렇게 쓰시냐고 감히 물을 아이는 하나도 없었다. 자작시를 들고 찾아가거나 시 아니더라도 어떤 국어문제, 문학에 대해 물어보면 상당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그런 소소한 것을 시비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우좌지간 눈물 핑 도는 수업시간에도, 청소시간에 복도에서 만났을 때도, 심지어는 교감선생님과 얘기하는 것을 지나다 언뜻 들었을 때도...정색을 하고 "우좌지간", "어피차"라고 말했다. 어느 새 우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해 버리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래서 박선생님에 대해서는 거의 까마득하게 잊고 말았고, 말버릇도 다시 예전대로 돌아왔는데...오늘 아침에 왜 갑자기 "우좌지간"이라고 말했을까. 그 때 그 교실에 앉아 있던 우리 동무들도 나처럼 문득 "우좌지간"이라고 말을 할까.
그 때도 대학입시는 치열했다. 지금이야 아무나 다 가야 하는 교육과정으로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정말 멋진 엘리트, 거기에 올라가고자 아름답게 꿈꾸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끝내는 그 꿈을 접어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이미 입시를 치러 고등학생이 된 우리들이었던지라 특별히 실력이 쳐져서 대학을 포기하기보다는 경제사정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쨌든 참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러나 만약 지금이라면, 수업을, 그것도 보충수업을 그 따위(?)로 하는 선생이 있다면 당장 퇴출감일 것이다. 학교 관리자나 다른 선생님, 그리고 학생 본인, 전해들은 학부모들도 몰려와 쫓아내라고 시위를 할 것이다. 그렇지만...그 때는 그런 괴짜 선생님들이 제법 흔했다. 지금처럼 안정된 직장을 위해 교사가 되려는 것보다, 다른 것을 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교직에 몸 담은 이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박봉이었음에도 그것을 외면하지 못 했던...가난한 이들의 꿈. 학교를 떠난 박선생님은 과연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우리보다 스무 살쯤 많은 서른 중반의 그 분은 지금도 어디선가 이 하늘 아래 살아계실까. 창 밖으로 펼쳐진 맑은 하늘, 우리들의 푸른 꿈, 언제나 슬펐던 박선생님 슬픈 눈과 절룩거리는 외로운 뒷모습...아침부터 목이 멘다.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 국어 선생님 (06. 06. 29) by 운동화
- 감기가 마이 나아져씀다. 앗솨.. by 키세
- 그 붉은 꽃을 주었던 것은 누구? by 소화니
- 대한민국 교육을 말하다 _ [2011년 어느 가상의 날] by 아임이미리
- 마지막 수업 - 다른 학생 버전 by 초록불
# by | 2009/04/02 09:41 | 추억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