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여자대학교 앞에 갔다. 살 것도 구경할 것도 없었지만 그냥 시간이 조금 남길래 그리 빙 돌기로 했다. 여대 앞은 눈요기가 많아서 시간이 얼른 지나갈 터였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여대 앞은 정말 화려하다. 그리고 갈수록 그 화려함이 더해간다. 약간의 먹거리를 빼면 대개 길 앞에 나와 있는 상점은 옷, 구두, 화장품, 가방, 악세사리, 미용실 뿐이다. 뒤쪽으로 들어가야나 먹거리가 있는데, 그마저도 신기하게 술집이 많다. 과연 이 상점들이 모두 여기 대학생들 위한, 여기 대학생들이 이용하는 곳이 맞나 싶다. 지나가는 이들은 여대 앞이니만큼 남자는 참 드물고 여자들이 거의 다다. 그런데 저이들이 과연 대학생들 맞나 또 궁금해진다. 요즘 젊은이들이야 워낙 키도 크고 늘씬해서 아무나 붙잡고 연예인 시켜도 될 것 같긴 한데, 패션잡지에서 쏙 빠져나온 듯한 그들이 진짜 이 대학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인가 갸웃거리게 된다.

저렇게 곱게 화장을 하고 머리를 가꾸려면 얼마나한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할까. 당장에 바르고 그리는 데 투자하는 시간 정도가 아니라, 저것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찾고 사고 연습하고 하는 것부터가 여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 특정한 누군가를 위해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동무들과 견주기 위해서, 혹은 거울 마주하고 서 있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저렇게 꽉 끼는 옷, 저렇게 약간만 숙여도 가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옷을 입고 종일 강의실을 종종거리며 다니는 게 불편하지는 않을까.

구두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봄구두를 간편한 걸로 하나 산다고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들어섰다. 점원이 쭈볏쭈볏 나와 옆에 섰다. 어떤 사이즈를 찾으시는데요? 사이즈야 나중 일이고 우선 모양을 봐야 하지 않겠나. 점원조차도 어지간히 급하게 구는 땅, 내가 사는 나라다. 진열된 구두를 찬찬히 훑는데 도무지 마음에 차는 게 없다. 저런 구두를 신으려면 거기에 맞게 옷은 또 얼마나 요란스러워야 할까. 이제 더워지는 계절이라고 사방이 뚫린 구두들 뿐인데도 어째 다들 발등을 덮고 있을꼬. 고개를 몇 번 갸웃했더니 점원이 또 종알거렸다. 요즘은 높은 게 유행이라서요, 저쪽에 낮은 것 있는데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얌전하다 못 해 한심하기까지 한 아줌마, 아니 할머니용 구두들이 기가 죽어 놓여 있다. 그래도 구색은 갖춰 놓았구나. 하지만 중간 단계가 없다. 이십 대 구두와 육십 대 구두 사이가 없단 소리다. 그리고 모양은 어찌 그리 촌스러운지 삼십 년 전 모양 그대로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나라에는, 젊은 것들 아니면 무작정 삼사십 년 저쪽에서 머물 노인네들만 있다고 떠들고 싶은 것인가. 아무리 노인네라 하더라도 새로운 디자인을 제공하려는 기미조차 없다. 하긴 어디 구두나 옷 뿐이랴. 방송 프로그램이나 하다못해 노래조차도 다 그 따위로 밀어두고 뒷방이나 지키라고 하는 식인데. 진짜 죄다 높네요. 젊은 사람들 것 뿐이라서요. 젊은 사람들 것이 이렇게 높은 게 문제라는 거지요, 말랑말랑한 뼈를 혹사하고 나중에 늙어서 아예 누워서만 지내려고 그러는지 원. 사실 그렇게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만 점원 말이 웃겨서 일부러 과장되게 삐딱하게 늙은 흉내를 내보았다.

얼마 전 동호회 아우네 갔을 때, 그 집 아들이 애인을 데리고 왔었다. 그 애가 벗어놓은 구두를 본 아우가 기함을 했다. 아니 너는 무슨 빌딩을 신고 다니니. 여자애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다들 그런 걸요, 했다. 저거 신고 어떻게 걷고 뛰어, 힘들지 않니. 처음에는 좀 그랬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익숙해졌다고 해도 저걸 신고도 괜찮다면 그게 사람 다리냐.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킥킥 웃었었다.

구두가게에서 나와 맞은 편 다른 구두가게 진열대를 쓰윽 훑어봐도 다 똑같다. 사선으로 건너편에 있는 가게도 마찬가지다. 그제서야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았다. 내가 너무 나즈막하게 여겨지도록 키다리 젊은이들이 지나가는데 그 큰 키에 또 구두도 보통 12센티 굽은 되겠다. 가끔 차 안에서 지나가는 여자들 보면서, 저렇게 예쁜 구두를 신고 자세가 어째 저 꼴이야 했던 대로, 그리고 딸애가 투덜거리면서, 그 따위로 엉거주춤 걸을 거면서 높은 구두는 왜 신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처럼 제대로 멋지게 걷는 이가 참 드물다. 물론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방금 패션쇼에서 나온 모델같이 멋진 차림으로 어깨 좍 펴고 쭉쭉 곧게 걷는 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좀...꼴불견이다.

워낙들 높아서 그런지 조금 떨어진 데 있어야나 내게 그들 전신이 다 보이는데, 그 모습들이 또 웃겼다. 아직 좀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나풀나풀 속옷인지 겉옷인지 모를 천으로 옷을 입은 가녀린 그들이 한결같이 구두에 치여있는 것이다. 뒷굽은 가늘고 턱없이 높지, 발의 각도를 덜 꺾으려 함인지 앞축도 잔뜩 높여놓은 것도 많지, 게다가 발등 혹은 심하면 발목 위에까지 칭칭 감고 올라간 모양들이 요즘 유행인 모양이어서 발이 무거워 보였다. 그나마 키가 큰 여자들은 낫다. 작은 키를 구두로 키워보려는 듯한 이들은 정말 구두만 걸어가는 것 같다. 그것이 예쁘고 멋있어 보인다면 도대체 그 눈은 어떤 눈일까. 그게 개성이라고? 그들은 개성이라고 부르고 나는 그들만의 획일이라고 말하는 그 모양내기도 일단 좋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이야 젊어 힘이 있으니 견디는 데 문제 없다고 하겠지만, 종일 저 구두 속에 갇혀 있을 발, 잔뜩 긴장해 있을 무릎관절, 골반과 허리가 과연 언제까지 견딜까. 대학생들이 중고생들처럼 학교에서 실내화를 신는 것도 아니겠고, 종일 높은 구두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퉁퉁 붓고 피곤할 텐데. 하이고, 대학생은 아닌, 앞에다 띠를 둘러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들조차 높은 구두를 신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즘 유행하는 저 구두들이 영 낯설지는 않다. 오래 전 대학 다닐 때, 개봉하는 영화를 반값에 보겠다고 동무들과 의정부 나들이를 자주 했었다. 그 때 의정부는 길이 좁고 한적하고 커다란 외제 웨곤들이 굴러다니는 낯선 도시였다. 영화를 보러온 우리들은 극장에 가기 전부터 눈요기 거리가 많아 두리번거리느라고 바빴다. 특히 남자애들은 입을 헤 벌리고 정신없어 했다. 짙은 화장, 짧은 옷, 그리고 무엇보다도 터무니없이 높고 화려한 구두를 신고 키 큰 미군 팔을 끼고서 그 걸음을 따르느라 종종거리는 여자들 때문이었다. 햐, 저걸 신고도 뛰네. 그래, 바로 그 구두다. 의정부 미군부대 앞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 구두들이 지금 대~한민국 전국토를 서슴없이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세월은, 밤거리 여자들이 신던 것을 이제 대학생이 신는 것으로 바꾸어놓는 재주가 있구나 싶다.

외국에 나가보지 않은 나는, 이즈음에 종종 그쪽 거리가 궁금하다. 거기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패션이 넘실거리는 우리의 땅을 걸으면서 정말 그들도 몽땅 그렇게들 꾸미고 살까 궁금하다. 예쁘게 보는 것이야 세월 따라 사람 따라 다르게 마련이므로 내 기준만 옳달 수 없는 건 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이제 구닥다리가 되어 이해를 못 한다고 쳐도, 사람 몸으로 저런 것을 신고 아무 불편 못 느끼고 편안하게 강의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것인지, 우리 젊은이들은 그렇게 진화한 것인지 의아하다.

모두 그런 건 아니다. 그들이 워낙 높고 화려해서 눈에 띌 뿐이지, 적어도 반쯤은 편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운동화나 편해 보일 정도의 구두를 신고 있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을 한다. 적어도 스무 해쯤 지나서 모두들 엉치야 허리야 하며 어그적거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저렇게 편안해 보이는 구두는 어디서 팔꼬. 나, 한 켤레 사야 하는데.

by 暗雲姬 | 2009/04/29 10:40 | 생각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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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LaJune at 2009/05/01 02:01
몇년전부터 쁘레따 뽀르떼니 뭐니 패션무대에서 킬힐이 유행을 해서 요즘 플랫폼 슈즌지 뭔지 앞 가보시도 높고 뒷굽은 20센티까지도 되는 그런 부류의 구두들이 대유행이더라고요. 그래서... 일본에서 어떤 아가씨가 구두에서 떨어져 죽었다지요. 농담이 아니라요... -_-;;;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05/01 07:07
유행은 바뀌는 거니까 저 스스로 알아서 낮아질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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