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 바람 불면 선듯하고 바람 사위면 후텁거린다. 하늘 가득 몰려왔다 몰려가는 잿빛구름 다음으로 이어지는 구름도 썩 예쁘지는 못 하다. 환경학자인 동무의 말로는, 이제 우리나라 여름에 뭉게구름은 없다고 한다. 맞아, 정말 아주 오랫동안 그 풍성한 구름을 못 보았구나.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잊고 살아왔던 꼴이 한심해 스스로 우리가 불쌍해 지려고 하다가, 요즘 애들은 아예 본 적도 없겠다 싶으니 그만 애들이 더 불쌍해지네. 그나마 추억이라도 있었던 우리와는 또다르다. 그런데 뭉게구름도 환경오염 내지는 기후변화로 사라지는 거라니, 뜻밖이군. 환경 안 걸리는 데가 없구나.

이른 아침부터 바깥이 시끄럽다. 온동네를 다 부숴 버릴 듯이 뚜다다다, 저기 아스팔트를 뚫는 게다. 재작년에 길 넓히고 그 아래 상수도니 하수도니 오물로니 묻는다고 법석 떨어놓은 곳을 또 파헤치고 있다. 옆으로 또 길을 넓힌단다. 이거 원, 하구한날 늘어나는 자동차님들 배려하느라고 밭은 찌그러지고 길만 웽하니 뚫어 끝간 데 없이 달아나고 있다. 뚜다다다다다 바로 집앞인 듯이 가깝게 들리는 저 소리를 얼마나 더 듣고 살아야 할까. 매미가 나왔다가 다 달아날라.

바깥길 뿐 아니라 안길도 포장한지 3년째다. 어제처럼 비가 쏟아지면 신발 잡아먹던 진창은 없어지고 시멘트길 따라 물이 쿨쿨 흘러내려온다. 앞창 얕은 슬리퍼 신으면 금세 발이 젖는다. 그러나 걸음 서툰 노인들한테는 좋다고 하는데, 밭 빼놓고는 흙 밟을 일 없어지는 시골의 살이가 참 허망하다. 노인네들, 저 길을 좀 오래 걸어보슈, 관절 저릿저릿해도 계속 좋다 하실 수 있을지. 하긴 요즘은 시골마저 노인들 오래 걷게 둘 일 없다. 집마다 차 있고, 좀 드물긴 해도 골골마다 버스도 드나들고, 여차하면 콜택시 불러댈 수도 있으니까 이웃마실이나 살살 다니는 깜냥으로는 시멘트길이 무릎을 혹사하는 것 모르시겠지.

이맘 때면 나는 머위잎쌈이 먹고 싶다. 살짝 데친 쌉싸름한 넓은 잎을 손바닥에 턱 올려놓고 밥 한 술 얹고 된장 발라 입 딱 벌리고 푸짐하게 먹는 그 맛은 상추는 물론이요 호박잎과도 또다른 맛이다. 우리 마당 바깥에도 머위가 우거져 꽃이 피면 사진 접사 하겠다고 코 처박고는 했었다. 그런데 우리집은 물론이요 우리 마을에 이제 머위가 없다. 한 번은 아예 날 잡아 안길 좌우를 샅샅이 훑었는데 걸핏하면 무더기 무더기 앉았던 그것들이 단 한 군데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안길 포장하면서 사람이 씨앗 뿌려 심고 기르는 것 아니면 길옆 풀들은 싸그리 뽑아 버린 까닭이다. 세상에, 어쩌면 그렇게 모질 수 있담. 외진 다른 지역으로 원정이나 나가야 머위잎 구할 수 있으려나.

비 오시는 밤이면 뒤뜰에 나가 마당 가에 있는 머위를 찾았다. 우산 받고 쭈그리고 앉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숨을 죽이고 있노라면 머위잎 아래 그 어둔 그늘이 반짝반짝 빛나곤 했다. 반딧불이들이 죄다 넙데데한 머위잎 아래로 숨어드는 모양이었다. 비 피할 넓은 잎이야 어디 머위 뿐인가, 우리 마을에선 토란 키우는 집은 없지만 호박잎이랑 오이잎 따윈 여느 시골이라면 지천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비료 뿌리며 기르는 데서는 우리가 맡지 못 하는 어떤 냄새가 나서일까 반딧불이들은 꼭 머위 아래만 오글오글 반짝 영롱 모여들었다. 행여 그것들이 놀라서 비 뿌리는데도 대책없이 튀어나갈라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어둠 속을 응시하며 30분, 한 시간...팔뚝에 소름이 돋고 발에 반짝반짝 전기가 올라도 차마 편하게 옮겨딛지도 못 하고 쭈그린 채로 버티노라 애를 썼다. 반딧불이 그 신비한 빛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내가 살아 있지 않다는 기분도 들었다. 몸을 빠져나간 영혼이 동동 떠서 반딧불이들과 어울려 머위 아래로 기어들어가는 듯했다. 눅눅한 습기, 툭툭 듣는 빗소리, 전깃불빛 없는 시골 뒷마당, 컴컴한 머위 그늘...저희들이 쉬는 숨 때문일까 공기의 흐름 때문일까, 밝아졌다 희미해졌다 하는 그 작은 빛들이 모여 때로는 머위잎 무늬가 비쳐보이기도 했다. 팅커벨이 요정가루를 뿌린들 그처럼 황홀할까.

이제 비가 와도 찾아갈 어둠, 짙게 우거진 잎그늘은 없다. 반듯반듯하게 구획된 안쪽에서만 상추며 호박이며 토마토며 자랄 뿐 길가에 후줄근한 풀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터다. 우리 마을에서 자취를 감춘 머위를 따라 반딧불이도 벌써 서너 해 보지 못 했다. 괜히 머위에 집착하느라 놓친 건 아닐까 싶어 주의깊게 살폈지만 은은하고 끈질긴 그 작은 빛을 하나도 마주칠 수 없었다.

어제도, 오후 몇 시간 개더니 밤이 되자 다시 투덕투덕 밭에 덮인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려오길래 살금살금 도둑걸음으로 나가 밭 주위를 빙빙 돌았다. 물론 끝내 어디에서도 숨어 있는 그 작은 불빛을 만나지 못 했다. 딸더러 물었다. 너, 반딧불이 기억해? 그럼요, 작년에도 봤잖아요. 작년에 언제? 아, 재작년이었나, 아니 중학교 때였나... 나와 함께 우산 아래 쪼그리고 앉아 머위그늘을 들여다보며 소리 죽여 웃음 깨물던 기억이 언제였던지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아예 반딧불이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딸, 그래서 시골에 머위가 뽑히고 반딧불이가 사라지는 거야, 인마.

저 뒷산 약수터 쯤에는 있지 않을까. 거기도 길 내겠다고 산허리를 잘라 뱀처럼 아스팔트가 휘감았지만 그래도 약수터는 그 위에 있으니 아직 안전지대 아닐까. 하지만 오밤중에 거기에 올라갈 수도 없고,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다정한 불빛을 만날 수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 동무한테 얘기했더니 재작년에 전원주택 지어 이사를 한 큰언니네에 머위가 있는 걸 보았다 했다. 그거 푸짐하게 좀 따다 다구. 오케이. 근데 말야 꼭 낮에 따. 밤에 무슨 잎을 따겠니. 그래도 혹시나 해서 말야, 밤에는 반딧불이가 거기서 쉬거든. 어, 그래? 그러면 반딧불이 구경하러 가야 겠네. 글쎄...텃밭만으로 농촌 흉내 내고 소꼽 노는 전원주택지에 반딧불이가 깃들어 있을 지는 확신할 수 없는데.

by 暗雲姬 | 2009/07/03 10:08 | 계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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