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도저히 못 견디겠다. 이 망할 놈의 감기 기운 때문에 무려 석 주일 정도 세상이 흐릿해 보이는 채로 살았다. 감기가 아니라 감기 기운.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에 눕기만 하면 건조한 목구멍이 간질거리면서 기침이 터져나오고, 기침 때문에 자다 깨다 물 마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부어 있다. 열은 살짝 올랐다가 가시고를 반복하고, 으실거리다가도 어느 틈에 말짱하기도 하고, 아침에는 제법 코도 찡찡거린다. 한 마디로 무척 불쾌하다. 딸내미가 자꾸 권해서 오늘은 병원에 가기로 했다. 막둥이 녀석이 아침에는 적어도 두 시간 가량 자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지. 살금살금 어떤 기척이라도 느낄까 조심해서 문을 나섰다.

9시 땡, 병원 문 여는 시각에 맞춰갔는데, 맙소사, 한숨이 절로 나왔다. 허연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접수처에서 수납까지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게 아닌가. 맞다, 신종 인풀루엔자 때문에 병원이 난리라지. 옆에 서 있는 꼬마는 기침을 심하게 하고 있는데, 꼬마보다 엄마 표정이 다 죽어간다. 아이가 아프면, 그것도 거의 괴질수준으로 방송에서 떠드는 병에 걸렸을 위험이 있다는 걱정이 앞서면 엄마부터 지레 죽기 마련이다. 저만치 앞쪽에 서 있는 애들 몇. 아이 부모는 무얼로 바쁜가, 유치원 선생님이 두 명이나 아이들 손을 잡고 줄을 서 있었다. 아예 유치원에서 단체로 병원에 데리고 오게 되어 있는가. 여든은 가까웠을 노인 부부가 다정하게 서서 콜록거린다. 마스크를 한 여고생은 연신 기침을 해대면서도 같이 와 이것저것 챙겨대는 아버지한테 땍땍땍, 그 기세로 보아 설령 확진이 된다 할지라도 금세 떨치고 나설 게 분명하다. 그 외에도 별별 사람들이 거의 스무 명 이상 불안한 듯 서성거리는, 한결같이 근심 가득한 줄 끝에 가서 서자니, 에효, 그냥 돌아서 나오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되나왔다가는 비실거리는 나를 보면 저녁 때 딸이 또 잔소리를 할 테니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접수하기까지 무려 30분이나 기다렸다.

플루 의심 환자들 가는 3층은 보지 않아도 돗대기 시장일 테지만 일반내과가 있는 2층은 아주 조용하다. 대기실에 앉은지 5분도 안 되었는데 나를 불렀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님도 허연 마스크로 나를 맞았다. 어, 선생님도 마스크 쓰셨네요. 보건소에서 하도 쓰라고 하니 도리 있나요. 의사님이 쑥스럽게 웃었다. 갑자기 귀 아래 무언가를 들이대는 간호사 때문에 깜짝 놀랐다. 열을 재는 거란다. TV에서 귓구멍에 집어넣는 것은 종종 보았는데 이건 그것과도 다르다. 흠, 제가 아주 구닥다리라는 게 여기서 드러나는군요. 저는 간호사 선생님이 입 벌려요 해서 혀 아래 체온계 넣는 것만 해봐서요. 의사와 간호사가 같이 웃었다. 일단 체온은 정상. 목도 붓지 않았다는데 내가 만지면 멍울이 만져진다. 기침하느라 목을 긁어대 그런 모양이다. 피곤해요. 언제나 피곤하시잖아요. 그러게요. 약은 3일치, 좀체로 주사 처방을 하지 않는 이가 내가 하도 비실거리니까 주사 한 대 맞으란다. 무슨 주사일까. 피로가 가시는 주사도 있나. 약 드시면서요, 기침이 심해지거나 열이 난다 싶으면 언제라도 다시 오세요.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주사실 있는 아래층으로 가다가 종합검진실 앞을 지나면서, 일반검진 결과는 진작에 왔는데 암검진 결과가 웬 일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억해내고는 들어갔다. 이름 대고 물으니 이레 전에 보냈단다. 어허, 우체국에서 실종된 모양이다. 다시 출력하여 내밀다가, 유방에 석회화 현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다시 검사해야 하나요, 그건 굶고 자시고 할 것 없이 지금 가능한 거지요. 그 자리에서 즉시 검사하기로 했다.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어두컴컴한 초음파실. 그 섬뜩한 젤이 싫다. 겨드랑이까지 꼼꼼히 발라 문질러댔다. 누워 있는 내게 모니터가 보이지 않는 게 불만이었지만, 내가 봐봤자 뭐 아나. 젤을 닦으면서, 목욕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산부인과로 결과를 보러 갔다. 나보다 대여섯 살 정도 많은 여의사는 나와 함께 늙어간다. 스무 해 전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많이 쪘다. 나도 그렇다. 의사와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는 게 좀 이상하기는 하다. 모니터를 살펴보던 의사는, 봄에 다시 검진하잔다. 보통 1미리도 안 되는 점 같은 석회가 여럿인 것과는 다르게 내게는 딱 하나만 있는데 그게 무려 8미리나 된다고 했다. 더 커지지 않으면 괜찮으니까 봄에 한 번 더 보자는 거다. 그 때 커 있으면 어떻게 하죠. 파내야죠, 걱정할 건 없어요. 걱정 안 된다. 걱정한다고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을 텐데 뭐. 당장 한두 달 사이에 죽을 거라면 걱정이 될 거다. 무얼 어찌 정리해야 할까, 이러저러하게 처리해놓으면 나 죽고 난 후에 다 그대로 할까...딸이 있으니 이런 걱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재검진이니 따위로 파랗게 질릴 나는 아니다.

아래로 내려오니까 접수처에는 조금 아까보다 더 긴 줄이 꼬리를 물고 있다. 그렇게들 무서울까. 매일 천 명 이상 환자가 늘고 있다는 보도를 듣는데 지난 두어 달 동안 죽은 사람은 열 명 조금 넘었다. 다른 병인들 그런 비율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들 이렇게 난리를 치지. 모두들 죽을 병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얼굴에 담고 서 있는 것이 미래의 어떤 위기를 담은 영화의 한 장면 같게만 느껴진다. 자기들이 정말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그 사람들은 알까 몰라.

주사실에서 맞은 주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침대가 죽 늘어선 걸 보는 순간 거기 누워 수액이라도 하나 맞고 싶어졌다. 하지만 막둥이가 곧 깰 걸, 아니 벌써 깨서 나를 찾아헤매고 있을지도 몰라, 얼른 서둘러야지. 예정보다 30분 이상 더 걸렸기 때문에 초조해졌다. 병원 앞 약국에도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예쁜 무늬가 그려진 밴드며 영양제 따위를 둘러보며 기다렸다. 아까부터 딸내미가 계속 메세지를 보냈다.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흘낏 읽기만 했을 뿐 답을 하지 못 했다. 약국에서 기다리면서 열심히 답을 보냈다. 반 년 후에 재검진을 해야 한다니 걱정이 태산이다. 나 자신을 잃는다는 것과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느낌이 다른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딸은 겁이 나는 모양이다. 내가 그리 쉽게 죽겠냐, 큰소리 쳤다. 사실 큰소리 칠 일은 아니다. 바로 10분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으시시한 세상에 살고 있는데, 거기로 둥근 바퀴 굴려서 끼어들 거면서. 받아든 약은 사흘치라서 제법 두툼했다. 기침약은 물약이었다. 어렸을 때는 조금씩 감질나게 먹는 기침약이 달아서 좋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한 모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하다가 어머니께 혼나곤 했다. 심지어는 동생 약을 훔쳐 먹기도 했다. 요즘에야 먹고 마실 게 흔해터졌으니 기침약 더 먹으려는 아이들은 없겠지.

집에 도착하니 편지함에 암검진 결과가 꽂혀 있다. 이런, 일찍도 오네. 지금 막 직접 받아가지고, 더구나 결과에 따른 재검진까지 하고 오는 길인데. 이레 전에 보냈다는 게 왜 이제사 왔나 몰라. 다시 볼 필요도 없으니까 들어오면서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아휴, 다행이다. 막둥이는 아직 잠에 빠져 있다. 온열매트를 켜주고 갔더니 뜨끈한 데서 늙으신 몸을 푹 지지면서 행복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것이다. 약을 먹었다. 꿀 같은 기침약도 찔끔 먹었다. 한 잠 잤으면 좋겠다.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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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暗雲姬 | 2009/11/05 12:16 | 삶..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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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11/05 12:3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11/05 12:42
젤루 좋아했던 게 원기소, 에비오제였는데. ㅎㅎ
Commented by 江湖人 at 2009/11/05 20:58
자나깨나 건강조심...입니다.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11/05 21:09
건강은 조금씩 잃어가는 게 정상입니다.
영원히 건강하고 영원히 살고 싶은 건 욕심일 뿐입니다.
그저 나이에 맞게 살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 안심해야 합니다.
안녕하시죠? 예쁜 마나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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