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팔자

전기에 문제가 생겨 종일 추위에 떨며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했던 내가, 어둑한 저녁에야 겨우 문제를 해결해놓고 귀가하는 딸을 밖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배가 고픈 김에 허겁지겁 먹고는, 이제 집에 가서 보일러 돌려놓고 느긋하게 쉬자 하고 막 들어섰는데 남편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40분 집 비운 사이에 들어온 거다. 집에 밥이 없네, 나 저녁 안 먹고 왔는데. 밥돌이는 나를 보자마자 밥타령이었다. 우리는 지금 먹고 들어왔고, 이제 밥 할 기운도 없고, 그냥 라면을 끓여먹든지 아니면 나가서 먹고 와. 종일 전기가 나가는 바람에 모터를 돌려 지하수를 쓰는 우리집에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먹지도 못 했노라니까, 그래?, 그 한 마디 뿐으로 이내 부엌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지친 나는 방에 들어와 누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고난 팔자가 좋은 남자다. 어젯밤에 비틀비틀 취해 들어와 고꾸라지자마자 전기가 나갔다. 암흑 속에서 여러 모로 애를 쓰다 포기하고는 아침에 먹이고 씻길 걱정에 잠도 자지 못 했는데, 신기하게 새벽에 차단기를 올리니 멀쩡하게 전기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밥도 먹고 말끔하게 씻고 출근을 했다. 그런데 또 다시 전기가 나가 종일 나를 종종거리게 만들었다. 이윽고 완벽하게 다 고쳐지자마자 또 들어와서는, 내게 말로만 전해 들었으니 그게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는 상상조차 할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다.

언제나 그랬다. 걸핏하면 압력기가 나가 물이 안 나올 때도 신기하게 남자는 골아떨어져 적어도 열 시간은 물을 쓸 필요가 없는 상태로 되어 있거나 아예 집에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그걸 고치려고 흙바닥에 엎뎌 끙끙거리는 나를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갑작스러운 추위가 몰아닥쳐 보일러가 얼어터져서 딸과 둘이 껴안고 덜덜 떨 때도 남자는 어딘가 놀러나가 그 추위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호된 몸살로 앓아누워 손끝 하나 꼼짝 못 할 때도 남자는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며칠씩이나 집을 비워 내가 털고 일어난 후 지난 이야기로만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면 되곤 했다.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실려갔을 때도 남자는 없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구한날 술에 절어 여러 날 계속 집을 비워 혹시 그 사이에 내 아버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나, 어떻게 찾아 연락해야 하나 걱정할 때는 아무 일이 없다가 모처럼 맨정신으로 들어온 날 바로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처가집에 민망한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갑자기 치솟는 열로 정신을 잃은 애를 업고 병원에 뛰던 날도 물론 남자는 없었다. 그렇게 지독하게 아팠노라고 아무리 입 아프게 말해봤자 보지 않은 남자는 히히 웃을 뿐이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비가 약한 벽을 타고 들어와 집이 물바다가 되었던 것도 남자는 전해듣기만 했다. 그걸 퍼내고 말리고 하느라고 비에 땀에 젖어 허둥댄 얘기에 실감을 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벌어져 나로 하여금 몸고생을 하게 만들고 마음고생 또한 그에 못지 않았건만, 내가 기억하는 바로는 단 한 차례도 남자는 그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거나 함께 겪은 적이 없다. 도대체 어떤 좋은 팔자를 타고 났길래 그렇게 비켜가기만 하는 걸까. 뒤늦게 내 설명을 들으며 지나치게 과장하고 엄살을 떠는구나 여기는 눈치를 대할 때면 억울하고 약이 올라 미치겠다. 그 때마다 어금니를 꽉 물고 혼잣소리를 한다. 살면서 팔자 좋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최후의 팔자가 어떨 건지가 중요한 거지.

이 글과 관련있는 글을 자동검색한 결과입니다 [?]

by 暗雲姬 | 2009/11/05 14:26 | 삶.. | 트랙백 | 덧글(2)

트랙백 주소 : http://emghim.egloos.com/tb/5161497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하미영 at 2009/11/13 12:11
ㅎㅎ 넘 억울하시겠다.
동영상으로 찍어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11/13 19:06
사는 동안 꼭 바꿔 살아봐야 할 텐데 말이죠.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