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8일
졸도했니?
차를 타면 절대 자지 않고 긴장해서 울어대는 녀석. 전에는 콜콜 잘도 자고 창 열어달라고 꿍꿍대다 제가 단추 눌러 문 열고는 코 내밀고 콩콩 바람도 맡더니만, 안 보이면서부터는 무조건 울고 본다. 어디를 가는지 몰라 두려운 걸까. 그 습관을 고쳐보고자 애를 썼지만 1년 반째 변함이 없다. 창을 열고 고개라도 내밀어주면 기겁을 하고 몸을 뒤로 뺀다. 그러다가...볼 일 다 보고 돌아오는 눈치면 그제서야 안심하고 엎딘다. 이제 집에 가는 거지...이렇게 편안해지나 보다.
어제 아마 일주일 만에 오래 돌아다녔던 것 같다. 얼마나 울어대던지 도중에 몇 번을 세웠다. 혹시 쉬야 마려 그런가 응가 마려 그런가 걱정이 되었는데, 쉬야도 한 번 하고 응가도 한 번 하고, 그러고도 계속 울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르고 토닥거리고 살살 쓰다듬고 뽀뽀 쪽 하고 큰소리로 야단도 치고. 뭐 야단 쳐야 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야단 맞는다는 눈치는 있다. 좌우간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밤새 잘 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직도 잔다. 피곤해 죽겠나 보다. 차가 달렸지 제가 걸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뻗대고 앉아서 긴장하며 울어댄 것이 더 피곤했을 것이다. 어휴, 또 나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잘 건가. 얀마, 밥 먹고 나가야잖어.
어제 아마 일주일 만에 오래 돌아다녔던 것 같다. 얼마나 울어대던지 도중에 몇 번을 세웠다. 혹시 쉬야 마려 그런가 응가 마려 그런가 걱정이 되었는데, 쉬야도 한 번 하고 응가도 한 번 하고, 그러고도 계속 울어서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르고 토닥거리고 살살 쓰다듬고 뽀뽀 쪽 하고 큰소리로 야단도 치고. 뭐 야단 쳐야 귀 어두워 잘 알아듣지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야단 맞는다는 눈치는 있다. 좌우간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밤새 잘 잔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직도 잔다. 피곤해 죽겠나 보다. 차가 달렸지 제가 걸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뻗대고 앉아서 긴장하며 울어댄 것이 더 피곤했을 것이다. 어휴, 또 나가야 하는데 언제까지 잘 건가. 얀마, 밥 먹고 나가야잖어.
2009년 11월 19일
사랑하면
마당에 개 한마리 에 엮다.
몇 달 전에 TV에서 '노견만세'라는 다큐멘타리를 했는데 개나 고양이를 기르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 무심히 보아넘기던 사람들조차 울었다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눈물이 핑 돌긴 했어도 여느 때 개나 고양이 등 짐승을 다루는 방송 보던 때와 다르게 나와 딸은 엉엉 울지는 않았다. 거기에 나왔던 병들고 죽어가다 끝내 떠난 열일곱 살 개들, 우리 막둥이도 열일곱 살, 그래서 그 아이들과 우리 막둥이를 비교해 보느라고 미처 울 정신이 없었던 거다.
우리에게 막둥이는 아직도 아기다. 눈도 안 보이고 귀도 거의 안 들리고 냄새도 못 맡지만 여전히 아기다. 개를 보는 눈이 남다른 우리 동호회원들은 막둥이를 볼 때마다 "꼬실이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제 가방 메고 초등학교 입학해도 될 것 같어."라며 웃는다. 하지만 짐승에게 별로 관심과 애정이 없는 보통사람들 눈에는 울 귀염둥이 막둥이도 늙은 개에 불과하겠지. 안 보인다면 혀를 차고, 못 듣는다면 또 혀를 찬다.
개가 그리 나이를 먹었다면 모두 한결같이 묻는 말이 있다.
- 나중에 어찌 보내려구요.
- 글쎄요...슬프겠지요.
- 나는 그래서 정들까 봐 개를 안 길러요.
- 부모도 보냈는데 개 보내면서 설마 내가 죽기야 하겠어요...
나는 정말 그리 믿는다.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개가 없이 살아본 적 없는 내가 보낸 많은 개들에 대해서 늘 그랬다. 슬프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계속 살아지고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결코 잊지는 않지만 헤어질 그 즉시처럼 인생이 자근자근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을 다시 품게 된 것은 먼저 보낸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모두들 내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각자의 개성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고, 몹시 힘겨운 때도 거뜬히 넘길 힘을 주었다.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마음이리라. 함께 해줘서, 마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나를 헤아려주어서, 외롭게 두지 않아서 고마운, 그래서 나도 너에 대해 그러리라 뿌듯하게 결심하고 실행하게 하는 마음, 그 사랑을 내 곁을 스쳐간 개들이 가르쳐주었다.
때로 희한한 제안을 하는 이가 있다. 막둥이가 늙었으니 죽기 전에 얼른 다른 강아지를 데려다 기르란다. 그래서 막둥이 죽으면 그 공백을 메우란다. 천만에다. 내 마음에는 막둥이의 자리가 있고 다른 개의 자리가 있다.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어 버릴 순 없다. 어머니 대신에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이 동무 대신에 저 동무로 될 순 없다. 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막둥이는 남은 시간을 온전히 충실하게 내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재롱둥이 갓난 강아지에 정신 뺏기고 시간 뺏기면서 막둥이를 뒷방 늙은이로 밀어둘 수는 없다.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짐승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내가 막둥이를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짐승은 짐승인 것을 무어라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느냐고 삐딱하게 보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사랑하는 줄 알지만 기실 인형 하나 갖추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여긴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애완견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사람 아닌 목숨을 대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받으면 허허 웃는다. 한꺼번에 두 마리는 못 길러요, 내 능력 밖이예요, 이렇게 둘러대면서 말이다. 그이들이 나를 생각해서 말한 것은 고맙거든.
때로는 개나 고양이를 애지중지 기르다가 보낸 경험이 있어서 그 후로 절대로 안 기르기로 했다는 사람들도 만난다. 몹시 사랑하던 벗이 죽었다고 다시는 누구도 만나지도 사귀지도 않는다 할 것인가. 부모님 보내고 보니 내가 갈 때 내 자식의 상심이 걱정되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 있는가. 사람에 대해서는 안 통하는 생각이 왜 짐승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건지 모르겠다. 또 다시 하는 말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 몫의 자리가 있고 그 몫의 사랑이 있다. 막둥이가 죽고나서 다른 개를 데려다 기르면서 막둥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다음 개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거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거지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까지 왈가왈부해서는 안 될 테니까. 생활이나 마음의 여건이 되어야 동물과 함께 하고 책임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조금만 두려움이나 걱정 접으면 훨씬 풍부한 사랑의 세계를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갖는 거다.
사랑하는 방식은 참 다양하다. 어떤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하고 이해하며 물고 빨고 하는 동호회원이 있다. 그 사람이 오면 썩 반갑지 않다. 대소변 가리는 훈련마저 안쓰럽다 제대로 시키지 않아서 아무 데고 찍찍거린다. 사람과 더불어 살려면 사람의 생활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자기네 집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니까 안 되었으면 데리고 다니면 안 된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자기식 사랑만 고집하는 이 때문에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다.
우리 딸은 막둥이와 싸우는 게 사랑법이다. 예뻐죽겠다면서도 종일 으르릉이다. 거기에 맞추는지 막둥이도 누나 앞에서 고집 피우며 싸울 일을 만든다. 잘 모르는 사람은 딸애가 개를 구박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 짜증내면서 왜 굳이 개를 기르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여느 동기간들끼리 티각태각 싸우면서 깊은 정을 나누는 것처럼 딸과 막둥아들은 그렇게 사랑을 표현한다. 한참 싸우다가 어느 결에 화해하고 싹싹 핥아주고 불끈 안아준다. 둘이 시끄럽게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다.
나라고 다르지는 않다. 나도 늘 막둥이와 싸운다. 아마도 막둥이는 우리와 싸우는 것을 제일가는 즐거움으로 알고 우리를 그렇게 길들였나 보다. 따뜻한 온열매트를 틀어주고 재웠더니 굳이 내 다리에 앉겠단다. 다리에 올라가지 못 하게 한다고 신경질을 낸다. 어두운 귀에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차근차근 타이르며 몇 차례 매트 위에 데려다줬다가 자꾸 빠져나오는 통에 끝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다리 저려 죽겠다고오, 왜 저기 따뜻한 데서 안 자겠다고 이 야단이냐고오. 큰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내 다리를 벅벅 긁으며 우웅우우웅꽁알꽁알 저 딴에는 무슨 그럴 듯한 이유를 대는 모양새다. 그게 우스워 내가 물러섰다. 지금 내 다리에 올라앉아 편안하게 자고 있다. 나는 다리가 저려 죽을 지경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다. 밀고 당기며 야단치고 변명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그러다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다리 이상으로 마음이 저려 꼭 끌어안고 만다.
나는 행복해. 너도 행복하니. 이렇게 행복하기 때문에 네가 떠날 때 슬프기는 할지언정 너와 만났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네가 주는 슬픔조차 사랑 끝에 오는 것임을 아니까 그것조차 기쁠 거야. 헤어지면서 슬플 존재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행복한 슬픔...!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누군가 때문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데려올 거야. 너한테처럼 진하게 사랑을 줄 거야. 하지만 너처럼 사랑하진 못 할 거야. 누군지 아직 모르지만 너와 같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깊이로, 다른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받을 거야.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몇 달 전에 TV에서 '노견만세'라는 다큐멘타리를 했는데 개나 고양이를 기르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 무심히 보아넘기던 사람들조차 울었다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눈물이 핑 돌긴 했어도 여느 때 개나 고양이 등 짐승을 다루는 방송 보던 때와 다르게 나와 딸은 엉엉 울지는 않았다. 거기에 나왔던 병들고 죽어가다 끝내 떠난 열일곱 살 개들, 우리 막둥이도 열일곱 살, 그래서 그 아이들과 우리 막둥이를 비교해 보느라고 미처 울 정신이 없었던 거다.
우리에게 막둥이는 아직도 아기다. 눈도 안 보이고 귀도 거의 안 들리고 냄새도 못 맡지만 여전히 아기다. 개를 보는 눈이 남다른 우리 동호회원들은 막둥이를 볼 때마다 "꼬실이는 나이를 거꾸로 먹나 봐. 이제 가방 메고 초등학교 입학해도 될 것 같어."라며 웃는다. 하지만 짐승에게 별로 관심과 애정이 없는 보통사람들 눈에는 울 귀염둥이 막둥이도 늙은 개에 불과하겠지. 안 보인다면 혀를 차고, 못 듣는다면 또 혀를 찬다.
개가 그리 나이를 먹었다면 모두 한결같이 묻는 말이 있다.
- 나중에 어찌 보내려구요.
- 글쎄요...슬프겠지요.
- 나는 그래서 정들까 봐 개를 안 길러요.
- 부모도 보냈는데 개 보내면서 설마 내가 죽기야 하겠어요...
나는 정말 그리 믿는다. 그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개가 없이 살아본 적 없는 내가 보낸 많은 개들에 대해서 늘 그랬다. 슬프기는 하지만 살아 있는 목숨은 계속 살아지고 다시 다른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결코 잊지는 않지만 헤어질 그 즉시처럼 인생이 자근자근 아프지는 않다. 그리고 새로운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그런 마음을 다시 품게 된 것은 먼저 보낸 그 아이와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는다. 모두들 내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각자의 개성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그 과정에서 행복했고, 몹시 힘겨운 때도 거뜬히 넘길 힘을 주었다. 사랑이란, 궁극적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마음이리라. 함께 해줘서, 마주보고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나를 헤아려주어서, 외롭게 두지 않아서 고마운, 그래서 나도 너에 대해 그러리라 뿌듯하게 결심하고 실행하게 하는 마음, 그 사랑을 내 곁을 스쳐간 개들이 가르쳐주었다.
때로 희한한 제안을 하는 이가 있다. 막둥이가 늙었으니 죽기 전에 얼른 다른 강아지를 데려다 기르란다. 그래서 막둥이 죽으면 그 공백을 메우란다. 천만에다. 내 마음에는 막둥이의 자리가 있고 다른 개의 자리가 있다. 어느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어 버릴 순 없다. 어머니 대신에 아버지가 될 수 없고, 이 동무 대신에 저 동무로 될 순 없다. 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막둥이는 남은 시간을 온전히 충실하게 내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재롱둥이 갓난 강아지에 정신 뺏기고 시간 뺏기면서 막둥이를 뒷방 늙은이로 밀어둘 수는 없다. 이런 제안을 하는 사람들은 짐승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고 내가 막둥이를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을 인정하는 이들이다. 하지만 짐승은 짐승인 것을 무어라고 그렇게 애지중지하느냐고 삐딱하게 보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사랑하는 줄 알지만 기실 인형 하나 갖추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여긴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애완견이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사람 아닌 목숨을 대하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제안을 받으면 허허 웃는다. 한꺼번에 두 마리는 못 길러요, 내 능력 밖이예요, 이렇게 둘러대면서 말이다. 그이들이 나를 생각해서 말한 것은 고맙거든.
때로는 개나 고양이를 애지중지 기르다가 보낸 경험이 있어서 그 후로 절대로 안 기르기로 했다는 사람들도 만난다. 몹시 사랑하던 벗이 죽었다고 다시는 누구도 만나지도 사귀지도 않는다 할 것인가. 부모님 보내고 보니 내가 갈 때 내 자식의 상심이 걱정되어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사람 있는가. 사람에 대해서는 안 통하는 생각이 왜 짐승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여기는 건지 모르겠다. 또 다시 하는 말이지만, 누구에게나 다 그 몫의 자리가 있고 그 몫의 사랑이 있다. 막둥이가 죽고나서 다른 개를 데려다 기르면서 막둥이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다음 개도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거다. 물론 내가 그렇다는 거지 모두가 그래야 한다고 우길 생각은 없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까지 왈가왈부해서는 안 될 테니까. 생활이나 마음의 여건이 되어야 동물과 함께 하고 책임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다만 조금만 두려움이나 걱정 접으면 훨씬 풍부한 사랑의 세계를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움을 갖는 거다.
사랑하는 방식은 참 다양하다. 어떤 잘못을 해도 다 용서하고 이해하며 물고 빨고 하는 동호회원이 있다. 그 사람이 오면 썩 반갑지 않다. 대소변 가리는 훈련마저 안쓰럽다 제대로 시키지 않아서 아무 데고 찍찍거린다. 사람과 더불어 살려면 사람의 생활에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자기네 집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니까 안 되었으면 데리고 다니면 안 된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자기식 사랑만 고집하는 이 때문에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 대해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다.
우리 딸은 막둥이와 싸우는 게 사랑법이다. 예뻐죽겠다면서도 종일 으르릉이다. 거기에 맞추는지 막둥이도 누나 앞에서 고집 피우며 싸울 일을 만든다. 잘 모르는 사람은 딸애가 개를 구박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리 짜증내면서 왜 굳이 개를 기르느냐고도 한다. 하지만 여느 동기간들끼리 티각태각 싸우면서 깊은 정을 나누는 것처럼 딸과 막둥아들은 그렇게 사랑을 표현한다. 한참 싸우다가 어느 결에 화해하고 싹싹 핥아주고 불끈 안아준다. 둘이 시끄럽게 아웅다웅하는 것을 보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다.
나라고 다르지는 않다. 나도 늘 막둥이와 싸운다. 아마도 막둥이는 우리와 싸우는 것을 제일가는 즐거움으로 알고 우리를 그렇게 길들였나 보다. 따뜻한 온열매트를 틀어주고 재웠더니 굳이 내 다리에 앉겠단다. 다리에 올라가지 못 하게 한다고 신경질을 낸다. 어두운 귀에 알아들을지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차근차근 타이르며 몇 차례 매트 위에 데려다줬다가 자꾸 빠져나오는 통에 끝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다리 저려 죽겠다고오, 왜 저기 따뜻한 데서 안 자겠다고 이 야단이냐고오. 큰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내 다리를 벅벅 긁으며 우웅우우웅꽁알꽁알 저 딴에는 무슨 그럴 듯한 이유를 대는 모양새다. 그게 우스워 내가 물러섰다. 지금 내 다리에 올라앉아 편안하게 자고 있다. 나는 다리가 저려 죽을 지경이다. 언제나 이 모양이다. 밀고 당기며 야단치고 변명하고 짜증내고 싸우고, 그러다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사실에 다리 이상으로 마음이 저려 꼭 끌어안고 만다.
나는 행복해. 너도 행복하니. 이렇게 행복하기 때문에 네가 떠날 때 슬프기는 할지언정 너와 만났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 거야. 네가 주는 슬픔조차 사랑 끝에 오는 것임을 아니까 그것조차 기쁠 거야. 헤어지면서 슬플 존재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은 절대 모르는 행복한 슬픔...!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누군가 때문에 내가 행복하기 위해 누군가를 데려올 거야. 너한테처럼 진하게 사랑을 줄 거야. 하지만 너처럼 사랑하진 못 할 거야. 누군지 아직 모르지만 너와 같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깊이로, 다른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받을 거야. 너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 by | 2009/11/19 21:01 | 막둥 | 트랙백 | 덧글(4)
2009년 11월 13일
달팽이 아니건만
집을 이고 다녀야 하는 달팽이도 아니건만 아무 데도 못 간다. 아니, 아무 데도 못 가는 게 아니라 막둥이 못 가는 데는 아무 데도 못 간다는 게 맞다.
어려서부터 식구 없으면 물도 안 마시는 바람에 늘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17년 동안 꼭 가야 하는 공연이나 그런 데 가기 위해 서너 시간 친정이나 동호회원에게 맡겨놓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앞 못 보는 남의 개를 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쉬야나 응가 하고 싶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없고, 이 녀석 싸이클을 알아 시간을 맞춰 먹이고 싸게 배려할 수도 없고, 혼자 어그적거리다가 화장실 못 찾아서 끝내 쉬야 해놓고 꿍꿍 울고 있는 걸 봐줄 수도 없겠기에 말이다. 게다가 남에게 잠시 맡겨졌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해 하염없이 온 집안을 이리 콩 저리 콩 박으며 나를 찾아다닌다니 어떻게 맡긴단 말인가.
아주 큰 공연장 아니라면 대개 막둥이를 데리고 갔었다. 가방에 넣어서 문만 무사히 통과하면 영화건 연극이건 음악회건 춤판이건 내 무릎에 누워 옷을 덮고 있는 줄도 모르게 콜콜 자다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 된다. 어디에 와 있는지 상황 이해가 되지 않는 녀석이, 꼼짝도 못 하게 안고 있기만 하니까 답답해 꿍꿍 울어댄다. 처음에 미처 생각지 못 하고 데리고 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와야 했다. 물론 아주 작은 소리라서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 했지만, 조금 더 버텼더라면 녀석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크게 울었댔을 것이다.
참 오래 영화관에도 못 갔고 연극관람도 하지 못 했다. 올해 아마 뮤지컬 넷을 겨우 봤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달 연말까지 보아야 할 뮤지컬이 셋 더 있다. 막둥이를 딸애와 번갈아 보면서 다녀오기로 해서 결국 모두 여섯 번을 움직여야 한다. 같은 캐스트로 보아야 대화하기가 편하겠기에 그 날짜까지 맞추려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래도 어째, 뮤지컬보다는 막둥이가 더 중요한데, 여건이 안 되면 뮤지컬을 포기해야지. 그래도 어쨌든 딸과 둘이니까 번갈아서 막둥이와 뮤지컬 둘 다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든 셋이 함께 다니던 때가 그립다.
어려서부터 식구 없으면 물도 안 마시는 바람에 늘 손에서 놓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난 17년 동안 꼭 가야 하는 공연이나 그런 데 가기 위해 서너 시간 친정이나 동호회원에게 맡겨놓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가능하지 않다. 앞 못 보는 남의 개를 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쉬야나 응가 하고 싶은 낌새를 눈치챌 수도 없고, 이 녀석 싸이클을 알아 시간을 맞춰 먹이고 싸게 배려할 수도 없고, 혼자 어그적거리다가 화장실 못 찾아서 끝내 쉬야 해놓고 꿍꿍 울고 있는 걸 봐줄 수도 없겠기에 말이다. 게다가 남에게 잠시 맡겨졌다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해 하염없이 온 집안을 이리 콩 저리 콩 박으며 나를 찾아다닌다니 어떻게 맡긴단 말인가.
아주 큰 공연장 아니라면 대개 막둥이를 데리고 갔었다. 가방에 넣어서 문만 무사히 통과하면 영화건 연극이건 음악회건 춤판이건 내 무릎에 누워 옷을 덮고 있는 줄도 모르게 콜콜 자다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안 된다. 어디에 와 있는지 상황 이해가 되지 않는 녀석이, 꼼짝도 못 하게 안고 있기만 하니까 답답해 꿍꿍 울어댄다. 처음에 미처 생각지 못 하고 데리고 갔다가 기겁을 하고 나와야 했다. 물론 아주 작은 소리라서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 못 했지만, 조금 더 버텼더라면 녀석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크게 울었댔을 것이다.
참 오래 영화관에도 못 갔고 연극관람도 하지 못 했다. 올해 아마 뮤지컬 넷을 겨우 봤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달 연말까지 보아야 할 뮤지컬이 셋 더 있다. 막둥이를 딸애와 번갈아 보면서 다녀오기로 해서 결국 모두 여섯 번을 움직여야 한다. 같은 캐스트로 보아야 대화하기가 편하겠기에 그 날짜까지 맞추려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그래도 어째, 뮤지컬보다는 막둥이가 더 중요한데, 여건이 안 되면 뮤지컬을 포기해야지. 그래도 어쨌든 딸과 둘이니까 번갈아서 막둥이와 뮤지컬 둘 다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어디든 셋이 함께 다니던 때가 그립다.
# by | 2009/11/13 20:09 | 막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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